네르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딱히 뭔가를 보러 다니지 않아도 되는 도시라서 좋았다.
아침 먹고 바닷가 가서 산책하다가 커피 한 잔 하고, 그냥 쉬고…
그래도 어렵게 온 여행이니 마냥 퍼져 있을 수만은 없어서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했는데 세비야로 가기로 했다.
구글맵을 켜서 봤더니 네르하에서 세비야에 가려면 바로 가는 건 없고, 말라가에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런데 말라가에서 세비야로 가는 길에 론다가 보였다.
난 방송에 나와서 유명해진 그런 장소로 여행가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덴 일단 사람이 많고, 방송을 통해 만들어진 환상이 그곳에 가서 실망으로 바뀔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에서 론다가 소개된 후 한국인이 많이 찾는다고 하던데 난 딱히 끌리지않았다.
하지만 세비야에서도 당일치기로 들렀다 갈 그런 곳이라는데 가는 길에 있는 걸 굳이 피할 것까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들리기로 결정했다.
말라가에 가서 론다 가는 버스표를 끊었는데 여섯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버스터미널의 보관함에 짐을 맡기고 천천히 말라가를 둘러 봤다.


알카자바에 먼저 갔는데 천천히 산책하거나 바다 전망 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로마식 원형 극장도 있어서 흥미로웠고.
버스 기다리는 동안 바닷가나 걷자 싶어 말라가 해변으로 갔다.
하지만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해변에 있는 여자 열 명 중 둘은 위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누드해변 뭐 그런 거 아니다.
그냥 선탠 하는데 브라 자국 생기니까, 혹은 벗고 있는게 편해서 그렇게 있는 거였다.
벗고 있는 이들은 괜찮은데 괜히 나만 괜히 민망해서 걷는 건 포기하고 근처 카페에 들어 가서 맥주 하나 시켜 놓고 아내 눈만 바라 봤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을 보게 돼서……

시간이 되어 론다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호텔을 검색했다.
누에보 다리에서 멀어질 수록 가격이 쌌다.
어차피 튼튼한 두 다리로 도시 전체를 둘러볼 생각이었으니 거리가 먼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가격이 싼 것 중에서 별점이 제일 높은 걸로 예약을 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아주 오래된 건물의 느낌이 났다.
안내데스크는 별도의 방에 책상과 책장을 갖춘 모습이었다.
오래된 책상을 마주 하고 앉아서 천천히 체크인을 했다. 학교 교무실에 불려 온 학부모가 선생님과 상담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객실 문을 열 때도 중세 시대에나 썼을 법한 열쇠를 이용해야 했고, 내부 장식도 가구도 모두 아주 오래 된 것처럼 보였다.
클래식이 잘 어울릴 그런 호텔이었다.
일단 짐을 풀고 바로 나왔다. 해 넘어 가기 전에 노을을 봐야 하니까.
도시가 예쁘다.
그 유명한 누에보 다리 말고, 론다 전망대에서 바라 보는 석양과 그 석양빛에 물든 언덕과 계곡과 바위들이 참으로 예쁘다.



마드리드, 톨레도, 그라나다, 네르하, 프리힐리아나, 말라가... 이제껏 지나 온 모든 도시들을 다 합쳐 넣은 것 보다 예쁘다.
이런 노을은 본 적이 없다.
여기 며칠 머물면서 해 지는 것만 계속 바라 보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페인은 다시 안 오더라도 론다만큼은 꼭 한번 더 올 것 같다.
론다를 빼 먹었으면 어쩔 뻔 했나 모르겠다.
누에보 다리 쪽 말고 호텔 직원이 추천해 준 식당을 찾아 한참을 마을 쪽으로 걸어 갔는데 한적한 느낌이 여기 좀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식당도 느낌이 좋았다. 그냥 다른 사람이 사는 집의 거실에서 대접 받는 그런 기분.
먼저 나오는 빵도 갓 구운 듯 맛이 있었고, 돼지고기와 새우 요리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위해 호텔을 나섰다.
예약할 때 보니까 조식이 살짝 비싼 느낌이 있어 조식은 포함시키지 않았거든.
아침에 산책 삼아 걷다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하는 곳이 있으면 거기가 맛집이고 또 가격도 쌀 거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게 결정적 실수였다.
그렇게 찾아 간 곳이 딱히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빵 한 조작하고 쥬스로 요기를 하고 호텔로 돌아 왔다.
그런데 호텔 문앞에 단체 관광객들이 늘어서서 뭔가 설명을 듣고 있었다.

요지는 이거였다.
이 호텔이 17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인데 그걸 지금까지 계속 원형을 유지해 가며 호텔로 쓰고 있어서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건축학적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호텔이라는 거다.
게다가 론다 현지식으로 나오는 조식이 유명해서 다른 곳에 머무는 이들도 일부러 들리는 그런 곳이라는 거였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이 유명한 호텔 조식을 마다하고 먼 길 걸어 가서 별 특징 없는 걸로 아침을 떼우고 만 것이다.
호텔 예약할 때 다른 이들이 남긴 후기만 제대로 봤어도 미리 알았을 텐데 후기가 대부분 스페인어라…… 쿨럭.
체크아웃을 먼저 하고 짐을 맡긴 후 론다 시내를 한 번 더 돌아 봤다.
해질녘의 론다도 좋았지만 아침 햇살을 받은 론다도 그에 못지 않게 예뻤다.
세비야를 포기하고 여기서 하루 이틀 더 머무를까 하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세비야로 향했다.

오늘의 팁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낡고 오래됐지만 나름의 이야기를 간직한 유서 깊은 호텔들이 많다. 그럴 때 호텔 자체가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방 문 열쇠가 좀 오래 됐다 싶으면 직원에게 물어 보자물어보자. 호텔이 간직한 이야기를 들려 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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