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2/05
1.
한국에 다녀왔다.
이 대목에서 ‘한국에 와 놓고 내게 연락도 안 해?’ 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노여움을 내려 놓으시길. 이번 한국 방문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연락 안 했으니, 특별히 더 노여워 할 것 까진 없다. 내가 하는 일 관련해서 전시회가 있어서 전시장 근처에서만 사흘 동안 있었다.
연락해서 만난 이는 아무도 없지만 전시장에서는 참 많은 이들을 만났다. 15년 전에 헤어졌던 후배도, 6년 전에 헤어졌던 선배도, 6개월 전까지 같은 회사에서 일 했던 동료들도 만났다. 한 때 팀장이었던 분을 각기 다른 회사 명함을 들고 비즈니스를 위해 만나기도 하고, 내가 참 못 되게 굴었던 협력업체 직원을 다시 만나 민망해 지기도 했다.
그 수도 없는 만남이 다 일을 매개로 한 만남이었다. 이봉렬 나와 홍길동 너가 아니라 A회사 직원 나와 B회사 직원 너로 만나는 그런 만남. 내가 가진 명함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틀려지는 그런 만남이 대부분이다. 앞으로 적어도 30년은 더 일해야 할 것 같은데 걱정이다. 명함이 필요한 그런 만남,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다.
2.
원래 토요일에 싱가폴에 돌아 올 예정이었는데, 하루를 더 연장하여 일요일에 돌아 왔다. 아무리 꽉 짜여진 일정이라고 해도, 이번에도 부모님 얼굴을 뵙지 않고 돌아가면 두고 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억지 수를 냈다. (회사에서는 모른다. 소문 내지 마시라.)
갑작스런 아들의 귀향에 많이 놀라 하셨고, 더 많이 기뻐하셨다. 자갈치에 가서 회를 먹었다. 택시에서 내리기도 전에 확 끼쳐오는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반가웠다. 차가운 바닷 바람도, 손님을 부르는 자갈치 아지매의 사투리도, 아직 잠들지 못한 바다 갈매기의 날개짓도 다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회 한 접시를 시원소주 세 병과 함께 비웠다.
“우리 아들 싱가폴 가서 술만 늘었네.”
“싱가폴에선 술 마시면 태형 당하거든요. ^.^ 한국에서 미리 다 마시고 가려구요.”
노래방에 가서 노래도 불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연안부두, 동백아가씨, 이별의 부산정거장, 고향역… 현철과 설운도가 앞서고, 태진아와 송대관이 뒤를 이었다. “요즘 노래도 한번 해 봐라.” 아버지 주문에 김건모와 조성모, 홍경민을 불러 모았다. 부모님껜 요즘 가수 맞다.
곁에 계실 때 회 한 접시 더 사 드리고, 노래방 가서 노래 한번 더 불러드리시라. 부모님 앞에서 재롱 떨 수 있을 때 원 없이 해 드리시라. 내 자식 초등학교 갈 만큼 자란 후에야 효도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내가 이렇게 늦다.
안방에 나란히 누웠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제 올끼고.”
“보고예”
“그래도 5년은 안 넘길끼제.”
“그러께예”
“낼 또 먼 길 갈라먼, 마 자라.”
“예”
아침에 눈을 뜨니 언제 준비하셨는지 밥상엔 진한 곰국이 놓여 있었다. 아직 단 한번도 외국에 나가 보신 일이 없으신 당신들께서, 자식 외국에 보내 놓고 느끼셨을 그 애달픔에 대해 내가 무슨 수로 용서를 빌 수 있을까. 다들 부모님께 잘 하시라. 제 자식에게 하는 것만큼만 하시라. 나 처럼 죄 지으면서 살지는 마시라.
3.
수원에서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국의 겨울을 눈에 담고 있었다. 산 중턱에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고, 이파리를 다 떨군 나무들은 불어 오는 바람을 맨 몸으로 맞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며 옷을 두텁게 입으라고 한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 체감기온은 영하 20도가 될 거라고 했다. 한 밤 중에도 2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적도 언저리에서 하룻만에 기온을 40도 넘게 뛰어 넘은 것이다.
싱가폴에 있으면서 늘 생각했던 것이 사계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흰눈 내리는 겨울에 대한 환상마저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싱가폴에서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겨울과 얇은 외투 하나로 직접 맞대는 겨울과는 차이가 있었다.
없는 사람 살기에는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보다는 일년 내내 더운 싱가폴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얼어 죽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기름 떨어지고, 전기 끊긴 방 안에서 70대 노인이나 어린 학생이 촛불을 켜 놓고 자다가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은 안 들어도 될 테니까.
서울역 앞에서 만난 노숙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얼마나 씻지 못했는지, 까맣게 변한 온 몸이 추운 날씨에 군데 군데 터져 있었다. 추운 것은 현실이다. 싱가폴에 사는 나는 그 현실을 까맣게 잊고, 흰 눈 내린 겨울의 풍경만을 떠 올리고 있다.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나리들도 그렇지 않을까? 따뜻한 집과 사무실 그리고 너른 차 안에서 고담준론을 읊느라, 정장 맨몸으로 추운 겨울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사는 건 아닐까? 그래서 서울역 앞에서 한 노숙자가 겨울과 맞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마냥 낭만적으로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어 한국도 열대나 별반 다르지 않았으면 하는 헛생각을 해 본다.
한국. 추웠다.
5.
지난 해 가을 한국 방문 후 ‘섹스하기 좋은 나라’라는 포스트를 올려 주위의 동료들로부터 꽤 많은 핍박을 받았었다. 올 해 초,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사를 올렸다가, 요즘은 동료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혀 거의 왕따 수준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같은 이야기는 입에 담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얼돌 체험방”이라는 흉칙한 간판을 본 후에 마음이 바뀌었다.
코엑스 주변에서 사흘 지내면서 서울 강남의 밤 풍경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다 아는 사실들 구질구질하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한 가지, 이 땅의 남자들이 다음 세상에서 환생한다면 꼭 여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자기와 똑 같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아가게 되기를. 자기가 전생에서 했던 일들을 낱낱이 기억하면서 그렇게…
난 다음 생에서 여자로 태어나 나 같은 남자를 만나 살아야 한다면….
수녀나 비구니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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