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2/05)
예전에는 수원에서 부산 가는 기차를 타는 건 서울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는 것 만큼 쉬웠다. 경부선의 모든 기차가 서울을 떠나 수원을 거쳐 부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KTX가 생기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선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의 운행편수가 급격히 줄었다. KTX는 수원에 서질 않는다. 이젠 수원에서 부산 가는 기차를 타려면 미리 시간표를 확인하고 예매를 한 후 역에 나가야 한다.
KTX를 타려면 수원에서 서울로 거꾸로 타고 올라와서 서울에서 KTX로 환승해야 한다. 무인 열차표 판매기에서 수원에서 부산가는 기차를 검색하면 경유지로 서울이 나오는 경우가 발생하는 게 다 그 때문이다. 돈을 돈 대로 많이 들고, 시간은 시간대로 많이 걸린다.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좋아진다고 하는 건 반만 옳다. 서민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자본가(정부 역시 자본가들과 한 패거리가 된 지 오래다)들이 장사하기 좋은 방향으로만 간다.
나 역시 부산가는 KTX를 타기 위해 수원에서 서울을 경유해서 가는 환승 열차표를 샀다. 요금이 49,400원이다. 한국을 떠나기 24시간 전이라 일분 일초가 아까웠던 나로서는 그나마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었다. 환승을 위해 서울역에 도착한 나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49일째 철야농성을 하고 있는 새마을호 승무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작년 12월 30일부터 시작된 농성이라고 했다. 이철 철도공사 사장이 애초 철도공사 소속 비정규직이었던 승무원들더러 감사원에서 청산하라고 한 KTX 관광레저라는 부실자회사로 옮겨가라고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시행되기 전 비정규직을 아예 외주화 하여 그 알량한 법 마저 피해가겠다는 의도다.
일반 기업체에서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도 정부가 나서서 말려야 할 처지에, 되려 정부가 앞장서 비정규직 확산 및 대량 해고를 부추기고 있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이철 사장이 저지른 이 같은 행위는 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운동권 인사에 대한 경멸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곁눈으로 흘낏 쳐다 볼 뿐 그들이 왜 대합실에 자리를 깔고 누웠는지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관심이 없으니 연대를 기대하기란 애당초 틀려 먹은 일이다. 사람들은 비정규직화와 해고의 칼날이 자기 목에 들이닥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농성의 이유가 적힌 유인물 대신 유명 연예인의 연애 기사가 1면을 장식한 스포츠 신문을 쳐다 볼 뿐이다.
KTX에 올라 탔다. 자리마다 정부의 치적을 홍보하는 격주간 잡지 ‘코리아 플러스’가 꽂혀 있었다. 커버스토리 제목이 ‘국민건강 나라가 책임진다’였다. 서울역 대합실 바닥에서 49일째 농성 중인 승무원들의 건강은 어떨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서울(대한민국 전체가 아니라)의 출산율이 13년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며 환호하는 기사와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에서 실은 출산장려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출산 관련 광고를 보면 대부분 ‘아이낳아 애국하자’는 식이다. 어찌 그리 사고가 경박하고 저급한지 끔찍하다.) 이 땅의 둘 중 하나는 비정규직이 되어 앞 날을 불안해 하며 살아가는 나라에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분명 죄 짓는 일이다. (그렇다고 정규직이라고 해서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천민자본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 노동자, 서민에게 희망은 없다.
저출산고령화 사회에 대한 확실한 해법 제안한다. 이 나라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의료와 교육만큼은 정부가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라.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경우 없게 하고, 가진 돈의 액수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지는 현실을 혁파하라. 그러면 나부터 내일 당장 아이 하나 더 준비하겠다.
다음 날(일요일)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 왔다. 농성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었고, 농성일수만 50일로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난 KTX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30분만에 달려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바퀴에 깔려 질식하는 수 많은 노동자들과 자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서민의 권리가 내게 바람을 가르는 KTX의 굉음보다 더 무섭게 다가온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부디 사람 생각하며 가자. 더디더라도 바르게 가자.
뱀발 - 이철 사장은 KTX 여승무원과 새마을호 승무원들 모두를 정규직화하고, 그들에게 사과하라. 당신 개인의 영달을 위해 그들의 삶이 그렇게 짓밟혀서는 안 된다. 당신의 행동은 자기 조직을 배신하고 상대편 조직의 돌격대로 변신한 조폭 똘마니가 자신의 원래 조직을 향해 그 누구보다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 처럼 보인다. 추하다. 더 추해지기 전에 그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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