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31)
한국에 다녀왔어요. 떠난 지 석 달 하고 나흘 만에 다시 찾은 한국은 참 많이도 변해 있더군요. 사실 변한 건 계절 뿐인데, 단지 그것 때문에 모든 게 변해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 같아요. 싱가폴은 더운 나라라 이민을 준비 할 때 긴 팔 옷과 외투는 모두 동생에게 주고 왔기에 이번 여행에 딱히 입을 만한 옷이 없었어요. 반팔 옷에 여름에 입는 얇은 웃옷 하나 걸치고 왔지요.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건 옷 뿐만이 아니었어요. 몸도 마음도 갑작스럽게 맞이하는 가을 때문에 적잖이 혼란스러웠지요.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지난 주까지만 해도 더웠다고. 그 지긋지긋하던 더위가 지난 주에 내린 비 덕분에 싹 물러나고 이제서야 겨우 가을이 찾아 왔다구요. 그런데 내가 한국을 떠나던 날엔 대관령에 얼음이 얼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일기예보에서 이번 주부터 한국은 추워진다네요. 프랑스엔 가을이 없고 환절기만 있을 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난 다행히도 한국에 일주일 밖에 머물지 않은 가을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았어요.
이번 여행기간 동안에 북한강변을 한 바퀴 돌았어요. 중부 고속도로를 따라 온통 단풍이 든 산 사이를 달리기도 했지요. 산이라고는 해발 164미터의 언덕이 유일한 싱가폴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환상적인 풍경이었어요. 제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면 내친 김에 부산까지 내 달릴 뻔 했어요. 도심에서는 가을 정취가 물씬 묻어 나는 올림픽 공원에 가서 느긋한 산책을 즐기기도 했어요. 몽촌토성과 조각공원을 뒤덮은 단풍이 참 예뻤어요. 예전에 아이들과 와서 함께 사진을 찍었던 곳에 가서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 보곤 했지요.
그래서 일까요. 가을 단풍에 눈을 씻고, 몸을 씻고, 마음까지 씻고 왔더니 아직도 내 몸에 밴 가을 향기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네요.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와야 하는데, 도로 여름이니 그걸 어떻게 적응하겠어요.
나는 가을을 겪고 있는 중인데, 주위는 여름이니 몸살을 앓을 수 밖에요. 은행잎이 조금만 더 짙었다면 한국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을 지도 모르겠어요.
홍대 앞에 잠깐 갔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일이 없었음에도 광화문 가는 길에 잠깐 들러 지나가는 사람들과 거리의 모습을 눈에 담고 왔어요. 혼자 간 탓에 닭갈비도 오뎅도 먹지 못하고 그냥 돌아 나왔죠.
친구들을 만났어요. 밤새 떠들고 놀다가 새벽이 밝아 올 때쯤 헤어졌지요. 좋은 친구들이예요. 청주 근처에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전화를 걸어 밤 11시에 만나자고 했는데, 그 늦은 시간에 두 말 없이 절 만나러 나와 주더군요.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 놓고도 되려 큰 소리 쳐도 되는 친구들, 그 시간에 불러도 꼭 나와 줄 것 같은 친구들. 그 친구들에게 내가 좋은 친구는 아니겠지만, 그 친구들은 내게 좋은 친구 맞아요.
맥주 한 잔씩 하고 감자탕 집으로 자리를 옮기는 도중에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파는 것을 봤어요. 난 어릴 때 포장마차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곳에서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엔 내가 친구들을 부추겨 오뎅을 하나씩 먹었어요. 따끈한 국물도 하나 가득 부어 마셨죠. 사실 난 아직도 전 그 날(!) 홍대 앞에서 오뎅을 먹은 기억이 나질 않아요.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까지 갔었어요.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불이 꺼져 있더군요. 내가 들어가 다시 불을 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새로 이사 온 이들이 목사님 부부라고 들었어요. 나처럼 먼 데로 떠밀려 가지 않고, 그 곳에서 오래 오래 잘 사시길 빌었어요.
이웃에 함께 살던 친구들을 만났어요. 휴가 나온 군인 맞이 하듯 바쁜 와중에도 다 나와주었어요. 다음에 또 나오면 귀찮아 할라나요? 설마요. 밥 먹고, 술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예전에는 집이 바로 옆이라 편한 옷 입고, 시간 되면 슬리퍼 끌고 집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갈 곳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친구 집에서 잤어요. 반기는 이 아무도 없는 호텔로 돌아 가기는 싫었거든요.
“거기 생활은 어때?”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말은 안 통하고, 일은 손에 안 익고, 음식은 도저히 못 먹겠고… 그냥 그렇지 뭐.”
“아이들은 잘 적응 해?”
“친구들 보고 싶은 것 말고는 다 좋대. 이러다가 일년쯤 지나면 한국에 안 돌아간다고 할 지도 모르겠어.”
“너는?”
“밤 마다 아내와 둘이서 껴 안고 울어. 다시 돌아 오고 싶어서.”
“오면 되잖아.”
“그러게 말이야…..”
어쨌건 다시 싱가폴에 왔어요. 창이공항을 나설 때 온 몸을 덮치는 그 후덥지근함이 여기가 싱가폴임을 느끼게 해 주더군요. 이민을 떠난 후 첫 한국 방문이라 그런지 기대가 컸었고, 그 기대만큼 아쉬움도 많아요. 그런데 그 아쉬움의 저 어디쯤에 당신도 있어요. 언제부턴가 한국에 가면 당신이 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길을 걷다, 거기가 광화문이든 홍대 앞이든 인사동 뒷 골목이든 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그 좋은 가을 날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 온 게 되려 뜻밖으로 느껴질 정도지요.
사실 당신은 그리 좋은 친구는 아니에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대부분 내가 여태껏 꺼려했던 것들이거든요. 당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종종 날 근심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하구요. 때로는 그냥 바라 보고 있는 게 아슬아슬 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당신이 참 친구하기 힘든 친구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이유 없이 입가에 살며시 웃음을 머금게 되죠. 남의 나라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속앓이 하며 지내는 내게 그거면 충분해요. 그러니까 당신 역시 좋은 친구예요.
자꾸만 말이 길어지네요. 내 몸에 스며 든 가을 때문일 거예요. 한국으로 가을 여행 잘 다녀왔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했어요. 가을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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