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1/26)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말레이지아로 갔다.
교회에서 수련회를 하는데 2박 3일 일정이라 나는 가지 못하고 집에 남았다.
금요일은 회사 일 마치고 늦게 돌아 와서 영화 한 편 보고 잤다.
문제는 토요일이었다.
아이들이 없는 토요일 오후, 참 낯선 경험이었다.
뭘 해야 할 지를 몰라 멍하니 텔레비전만 바라 보고 있었다.
지난 10월부터 싱가폴에서도 KBS를 볼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냉장고에는 반찬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밥을 하는 게 싫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밥 해 먹을 줄 모르는 나를 위해 아내는 냉장고에 초코파이도 한 상자 넣어 두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난 뒤 책장 정리를 하고, 널어 놓은 빨래도 개고, 청소기도 밀었다.
시간은 어찌 이리도 더디 가는지.
수영이라도 할 까 했는데 때 마침 비가 내렸다.
안성호의 소설 ‘때론 아내의 방에 나와 닮은 도둑이 든다’를 마저 읽었다.
인터넷을 뒤지던 중 아직 일하고 있는 중이라는 한국의 김모씨와 메신저 대화를 잠깐 했다.
토요일 오후까지 일하는 데에다 두고, 시간이 넘쳐나서 좀 더 놀아야 한다는 약올림성 메시지를 보냈다.
영화를 한 편 더 봤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총소리, 주먹다짐 소리가 방 안에서 부서질 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컴컴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같은 아파트 1층에 사는 할아버지인데, 저녁시간에는 자기 집 정원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만 있으면 ‘come, come’ 하고 부르는 바람에 별명이 ‘컴컴 할아버지’다.
여기 아파트는 1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따로 정원이 마련되어 있는데 컴컴 할아버지는 거기에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놓고 사흘에 한 번씩 작은 파티를 연다.
차려 놓는 것은 맥주 몇 병과 마른 안 주 한 두개가 다 지만, 사람들이 모이면 늦게까지 떠날 줄을 모른다.
슬리퍼를 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다가 갔더니 할아버지가 나를 알아 보고 ‘컴 컴’ 하며 부른다.
와인 도매상을 한다는 17층 아주머니와 독일에서 온 5층 부부가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의 말이 느려진다.
영어가 짧은 나를 배려하느라 말을 또박또박 끊어서 하고 쉬운 단어만 골라 쓰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못 알아 듣는 건 마찬가진데…
모두 태어나서 자란 곳이 달라 모이면 세계 곳곳의 이야기가 다 나온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거쳐,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 오래된 교회까지 두루 입길에 올랐다.
하루 종일 지루했던 내 마음도 몰라주고 시계 바늘은 벌써 새벽 2시를 가리켰다.
이래서 술을 끊을 수가 없다.
술이 없었다면 말 안 통하는 이들과 무엇으로 네 시간을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
이제 몇 시간 더 있으면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 온다.
회사 일 또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일에 익숙치 않아서 내게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이 부담스러웠나 보다.
다음에 한번 더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면 그땐 더 잘 놀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블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SBS 정준형 기자, 기사 날로 먹으려 하지 마라 (0) | 2022.02.04 |
---|---|
싱가포르 한인교회의 영어 찬송 (0) | 2022.02.02 |
소년원생의 탈출, 그들이 하고픈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0) | 2022.02.02 |
친구에게, 한국에 다녀왔어요. (0) | 2022.02.02 |
싱가포르 연무, 한반도의 핵구름 (0) | 2022.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