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11)
싱가폴에서도 교회를 다닌다.
교회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기는 하지만 아내가 교회에 많이 의지하고, 아이들이 교회에서 즐거워 하기 때문에 별 일 없으면 교회에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인교회이기 때문에 목사도 교인들도 모두 한국 사람들이다. 당연히 우리 말로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가끔 찬송을 부를 때 영어 찬송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예배 중에는 그러지 않는데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에 그런다.
스크린에 가사가 나오긴 하지만 나는 그게 영 못마땅하다.
우선은 내가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영어 못하는 사람이 나 하나 뿐이면 참고 말겠는데, 나 말고도 영어 찬송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몇 있다.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에겐 그 모임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는 지 살피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교회에서 예배 참석한 사람을 소외시키다니, 말이 되는가.
교회에서만 이런 일이 있는 건 아니다.
한 때 운동을 했다는 이들이 그들만의 언어나 그들만의 노래로 처음 운동에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높은 담을 쌓는 경우가 자주 있다.
촘스키나 고리키를 읽은 것 까진 좋은데,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모든 이들이 다 그것을 읽었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하는 건 촘스키가 알래스카 옆 동네 이름으로, 고리키가 러시아 보드카 이름 정도로 아는 이들에겐 대 놓고 면박을 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침이슬이 민중가요의 전부 인 사람을 옆에 앉혀 두고 꽃다지나 천지인을 들먹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한 때는 나 역시 진보를 이야기 하는 이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게 불편했었다.
아니 지금도 불편할 때가 있다.
교회에서 영어찬송을 부르며 저들끼리 거들먹 거리는 건 참을 수 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다른 행태들에 비하면 애교로 봐 줄 수준이니까.
하지만 진보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민중들과 자꾸만 거리를 만드는 건 봐 주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진보 지식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민중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민중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로 들려 준다는 것이다.
민중과 함께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사실은 민중과 자기 스스로를 억지로라도 떼어 놓으려 한다.
내가 한 때 그랬다.
민중가요에 한참 빠져 들 때 노래방에 가면 일부러 민중가요를 찾아 불렀다.
‘광야에서’ ‘푸르른 솔’을 찾다가 ‘직녀에게’ ‘귀뚜라미’ 소리를 들려 주곤 했었다.
나 같은 얼치기 들을 위해 노래방에도 그 정도 노래는 들어 있었다.
그러면 분위기는 싸늘해 지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노래 수준을 못 따라 와서 그러는 걸로 생각하곤 했다.
노래방에서는 다른 사람이 ‘호남열차’를 타면 나는 ‘백만송이 장미’라도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백지영을 부르면 나는 김건모라도 불러 내야 한다.
그게 배려고 그게 소통이다.
운동은 거창한 게 아니다.
민중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게 운동이다.
운동을 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별로 할 것 같지 않는 나 지만 운동하는 이들이라도 부디 그렇게 했으면 하는 맘으로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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