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전 블로그

정태춘을 듣는다

(2006/08/06)

여기 와서는 하루 종일 IPOD를 귀에 꽂고 산다
일단 말을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저런 영어 교재를 담아서 들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잘 안 된다

예전에 터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사원에 들어갔을 때인데 가이드가 우릴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을 해 준 일이 있었다
물론 영어였다
난 눈으로 즐기는 호사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가이드의 설명은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 보냈었다
친구는 그런 나를 위해 가이드의 설명 중 핵심만 골라 우리 말로 내게 다시 들려 주었다
그의 배려가 고맙기도 하면서도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들통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한국에 가면 영어 공부부터 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 다짐은 돌아 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깨졌고 지금 다시 그 사원을 찾는다고 해도 난 다시 그 친구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다

싱가폴에서는 영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영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국인과 회의를 해야 하는 일이 잦은데 나는 늘 입만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IPOD 에 영어 교재를 하나 가득 담고 다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IPOD를 꽂고 10여분만 지나면 어김없이 한국에서 듣던 노래를 듣게 된다
이 곳에 와서 정태춘만 100번 이상 들은 것 같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라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워낙 오래 된 공연이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태춘' 그 이름 석자는 그 날 이후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바꾸는 무기는 노래다.
신인시절 명랑운동회에 끌려 갔다가 보리자루 처럼 서 있다가 그 다음부터 TV 출연 자체를 거부했다는 그는 거의 모든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때론 노래로, 때론 경찰 앞에 몸을 내 던지며 세상을 바꾸는 일에 열심이다
대추리에서 경찰에 의해 목이 꺽이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정태춘의 5집 앨범을 처음 듣고 난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었다
'우리들의 죽음' '아, 대한민국' '형제에게' '떠나는 자들의 서울'...
난 책을 통해 세상을 학습한 게 아니라 정태춘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좋아하는 가수를 꼽으라고 하면 난 그의 이름을 제일 먼저 떠 올린다
좋아하는 활동가를 꼽으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싱가폴에서 정태춘을 듣는 건 아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껍데기는 여기에 두고 나는 온전히 한국에 가 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듣는다
정태춘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 내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