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한단고기’라는 책이 꽤 인기를 끈 후 ‘다물운동’이라는 게 기업체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다시 되돌린다는 뜻이라는데 그들이 뭘 다시 되돌리려 하는지는 다물 홈페이지에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21c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는 지금, 우리가 이 '다물'을 다시금 소리 높여 외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로 하나로 재편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지난 4천 3백년 민족사중 최고수준에 오른 경제력과 IT능력을 바탕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나아가 우리의 국력을 저 잃어버린 대륙강토와 바다에까지 뻗쳐 십수세기만에 동북아를 우리의 경제권, 생활권, 문화권으로 되살리는 진정한 세계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쉽게 요약하자면 우리 민족이 한 때는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위대한 민족이니, 지금 우리끼리 아웅다웅 하지말고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기업주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강조한다. 때문에 기업들은 엄청난 경비를 들여 가며 직원들을 대상으로 다물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작년에 한국의 대기업에 다닐 때 다물교육을 열흘간 받은 적이 있다. 교육 일정 중에는 백두산과 연변 자치구 방문과 중국 여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간 중간 민족사를 연구했다는 교수의 강의가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 되는 것처럼 우기는 통에 강의시간에는 졸고, 관광에만 집중했던 기억이 난다.
졸면서 들었던 그 강의 중에 딱 하나 지금까지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지금은 우리가 중국여행을 가서 한족에게 발 마사지를 받지만 경제가 어려워지고 중국이 더 부강해지면 언젠가 우리의 딸들이 중국 사람 발 마사지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내용이다. 그 강의를 듣고 함께 여행했던 이들이 단체로 발 마사지를 받으러 갔으니 내 기억에는 한 치의 오차가 없다.
그 말을 듣고 난 강사의 그 천박한 사고에 혀를 찼는데,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 여성이 한국 남성 발을 마사지하는 것과 한국 여성이 중국 남성 발을 마사지하는 것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지 난 알지 못한다. 내가 해서 안 되는 일은 남에게 시켜서도 안 되고, 내가 해도 되는 일은 남이 해도 되는 것이다.
다물교육을 통해 “우리의 국력을 저 잃어버린 대륙강토와 바다에까지 뻗쳐”서 이루고자 하는 일이 고작 한족에게 우리의 발 마사지를 맡기는 일이라는 그들의 사고가 두려웠다. 비뚤어진 민족의식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우리 모두 익히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 기업체에서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다물교육을 시키고 있다. 노동자들을 바보 만들어 천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저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없을까?
1년도 더 지난 다물교육의 경험을 꺼집어 내는 것은 연합뉴스에 실린 아래 기사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 이미지를 내세우는 이명박(李明博) 전 서울시장의 최측근인 그는 그러면서 "이렇게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사람 발 마사지하는 때가 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 총리는 답변을 통해 "참여정부를 문화혁명과 비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다"면서 "우리나라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이고 문화혁명은 전혀 그렇지 않은 체제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 총리는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잘못 해서 중국 사람들을 발 마사지 해주는 시대가 온다는 표현은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우리의 딸들이 중국 사람 발 마사지를 하게 할 수는 없다”는 다물의 핵심 모토에 감화된 정두언 의원의 그 단세포적인 사고에 한번 절망하고, 그 표현의 천박함을 제대로 짚어 주지 못한 한명숙 총리의 둔함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를 살리고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서게 하려는 목적이 고작 남의 나라 딸들에게 발마사지나 계속 시키면서 살려는 것이라면 선진국 안 해도 좋다. 저들은 우리가 미국보다 더 잘살게 되면 미국에 발마사지 하러 가자고 부추길 게 뻔하다. (외국여행 다녀와서 '백마 타 봤다'고 자랑하는 것들의 사고와 뭐가 다른가.) 없이 살아도 좋으니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 나라가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200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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