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 예경이 대학 졸업식 때문에 호주 퍼스에 다녀 왔다.
남의 나라에 혼자 보내 놓고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대학 학비 낼 생각하니 그동안은 도저히 호주에 따라 갈 생각이 안 나더라.
이제 졸업이니 더 이상 학비 나갈 일 없을 테고, 예경이 혼자 졸업식을 치르게 놔둘 수는 없겠다 싶어 가족 여행겸 해서 이번에 다녀 온 거다.
싱가포르에서 호주 퍼스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다.
싱가포르 항공 이용하면 1000 달러가 훨씬 넘지만 저가항공사 이용하면 그 반 이하의 가격으로 다녀 올 수가 있다.
비행기 타기 전에 공항에서 식사를 마쳤으니 기내식 없다고 아쉬울 건 없고, 짐은 기내용 가방 하나면 되니까 저가항공이라고 특별히 불편할 건 없다.
비행기 안이 추운데 저가항공은 담요를 안 주니까 겉에 걸칠 것 하나만 더 준비하면 된다.
관광허가비자(ETA)는 비리 발급을 받았고, 티케팅은 모두 무인발권기를 통해 금방 마칠 수 있었다.
저가항공의 가장 큰 문제가 출발 시간을 잘 안지킨다는 건데, 이번에는 지연시간이 30분을 넘지 않았다.
중간에 출출해서 잠이 깼는데 누군가가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원래 다른 사람이 먹는 라면이 제일 맛있어 보이는 법이다.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 세상에서 제일 비싼 컵라면을 시켜 먹었다. 작은 크기의 컵라면이 하나에 5달러.
호주 입국할 때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만 골라 지문 채취를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가족 셋 중에는 나만 걸렸다.
세상에 나 처럼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아, 아니다.
지문 채취만 빼고는 싱가포르 출국에서 호주 입국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매번 여행때마다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사고를 치거나 실수를 하거나 황당한 경우를 당했는데, 이번에는 너무 순조롭게 입국을 마치고 마중 나온 예경이까지 만나니 뭔가 살짝 불안해졌다.
한국 갈 때 대한항공 티켓을 사 놓고 아시아나 비행기 시간에 맞춰 가서 티켓을 다시 사야 했다거나, 00시 45분 비행기를 끊어 놓고 날짜를 잘못 봐서 다음날 공항에 갔다거나, 공항 게이트에 너무 일찍 가서 기다리다 잠깐 조는 사이에 비행기가 떠나 버리는... 뭐 그런 사소한 일들이 늘 있었거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황당한 사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비행기나 공항과 관련된 게 아니었다.
퍼스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닌데다가 싱가포르와 운전석 위치가 같고 (한국과는 반대) 이번에 사막 여행을 가기로 했기 때문에 렌터카를 미리 예약해 뒀었다.
행여 문제가 있을까 봐 조금 비싸더라도 제일 유명한 업체에서 예약을 했고, 내비게이션과 보험도 충분하게 포함시켰다.
이런 사막을 가려면 당연히 차가 필요하다. 그것도 사륜구동 SUV
렌터카 부스에 가서 예약 확인서를 보여 주며 사막 여행을 위한 사륜구동 SUV를 내 놓으라고 큰 소리를 쳤다.
직원은 생글 웃으면서 면허증 부터 보여 달란다.
아...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싱가포르 내 집 안방 서랍장에 몇년째 잘 보관하고 있는 내 면허증이.
차를 받기 위해서는 예약 확인서가 아니라 면허증이 필요하다는 그 기초적인 상식이.
방법이 없었다.
면허가 있는 예경이의 호주 친구를 불러 차를 받는 편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행여라도 사고가 났을 때 면허증을 보여줄 수 없다면 수습할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앱을 통해서 예약 취소 버튼을 눌렀다.
미리 결제한 금액의 거의 절반이 취소 수수료로 날아가 버렸다.
이제껏 렌터카를 이용하는 걸 전제로 계획했던 모든 일정이 다 어긋나 버렸다.
계획을 다시 짜야 했다.
호주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차가 없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아내는 여행자 같은데 난 점점 노숙자 분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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