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 “건국 이래 최대의 게이트”라는 홍보 문구를 앞세운 영화 <마스터>가 개봉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부랴부랴 “통쾌한 범죄오락액션” 영화로 문구를 바꿔야 했던 영화였다.
이병헌이 연기한 진 회장은 다단계회사 원네트워크를 만들어 조 단위의 사기를 치고 필리핀으로 도망을 가서 거기서도 사기 행각을 벌인다. 강동원이 연기한 지능범죄수사팀장 김재명은 진회장의 최측근인 박장군(김우빈)을 끌어 들여 결국 진회장을 잡는다는 내용이다.
진현필 회장이 다단계 사기꾼인 것도 그렇고 이름의 초성(ㅈㅎㅍ)도 그렇고 희대의 사기꾼인 조희팔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임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난 진 회장에게서 삼성 이재용 부회장을 봤다. 진 회장이 사기를 치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뇌물을 먹인 고위 공직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재명이 박장군과 손을 잡고 증거로 빼내려고 한 것도 진 회장의 뇌물 장부다.
2005년, 고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삼성 부회장의 대화 녹취록, 이른바 삼성 X파일을 보면 홍 회장이 이 부회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홍 : 김상희(당시 법무부 차관) 들어 있어요? 그럼 김상희는 조금만 해서 성의로써, 조금 주시면 엑스트라로 하고... 그 담에 이는 그렇고, 줬고. 김두희 전 총장은 한 둘 정도는 줘야 될 거에요. 김두희는 2천 정도. 김상희는 거기 들어있으면 5백 정도 주시면은 같이 만나거든요... 석조(홍석조, 당시 광주고검장)한테 한 2천 정도 줘서 아주 주니어들, 회장께서 전에 지시하신 거니..."
전 법무부장관, 현직 법무부차관, 현직 고검장에게 얼마를 뇌물로 줘야 하는지 논의하는 내용이다. 특히 홍석조 광주고검장에게 2천(만원)을 줘서 아주 주니어들, 즉 홍회장이나 이부회장이 직접 상대할 급이 안되는 일선 검사들에게도 돈이 갈 수 있도록 하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노회찬 의원의 폭로로 누가 처벌을 받았을까? 황교안 전 총리가 수사를 지휘했는데 다들 기억하듯 떡값을 받은 법무부 인사, 검찰 인사는 그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 노 의원만 통신비밀보호법위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되어 의원직을 잃었다.
재벌 고위 임원이 전현직 장차관과 고검장 그리고 그 밑의 “아주 주니어”들에게 까지 뇌물을 먹인 사건이 들통이 났는데 재벌, 장차관, 검사까지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대신 녹취록을 공개한 국회의원이 직을 잃게 되는 영화 같은 일이, 아니 영화라면 개연성이 떨어진다며 욕을 들었을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그럼 2021년에는 뭐가 좀 달라졌을까? 오늘(1월 18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뇌물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은 2심 판결에서 인정한 뇌물 액수 36억은 86억이 맞다고, 그래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는 잘못된 판결이라고 다시 재판을 하라고 돌려 보냈다. 그런데 정준영 판사는 다시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뇌물액 86억원이면 최저형량이 징역 5년이라는 건 판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달라진 건 이번에는 차마 집행유예로 풀어 주지는 못했다는 것 뿐.
표창장 위조가 4년이고, 식당에 들어가 라면 하나를 훔쳐 먹어도 상습범이라며 3년 6개월을 선고하는 나라에서 이재용 부회장에게는 어찌 이리도 관대한가. 판결문 곳곳에서 더 이상 죄를 줄여 주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읽혀진다.
이재용 구속에 재계 “한국 경제 전체에 악영향” – 중앙일보
이재용 실형선고에 탄식…법정 곳곳서 울음소리도 – 매일경제
삼성그룹株, 이재용 실형 충격에 우수수…삼성전자 3% 하락 – 한국경제
그 와중에 언론들은 2년 6개월의 실형 마저도 과하다며 “탄식”을 쏟아내고 있다. 난 진심으로 궁금하다. 이재용 부회장의 장부에는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을지. 아니 검찰청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장부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지 그게 더 궁금하다.
영화에서 진 회장은 장부를 들고 박장군에게 이런 말을 한다.
“여기 장부에 이름 적힌 놈들 다 내 개야. 내가 짖어 달라면 물어버리고, 물어 달라면 삼켜버려.”
오늘은 개 짖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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