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여행 이틀째, 전날 갔던 한국 식당의 주인이 바르셀로나에 며칠 더 있을 거라면 몬세라트에 가 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해서 바로 검색을 했더니 기차 타면 얼마 안 걸리는 곳인데다가, 산세가 예뻐 보여 즉흥적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스페인 광장 역에서 표를 끊으려고 기계 앞에 서서 이것 저것 눌러 보는데 중년의 사내가 다가 오더니 도와 주겠단다. 말로만 듣던 바르셀로나 기차역 사기꾼을 만난 것이다. 발권을 도와 주는 척 하며 카드를 들고 튄다거나, 지니고 있는 가방이나 지갑을 턴다거나 하는 짓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발권까지 해 주고 수고비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단다.
단호하게 거부 표시를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천천히 기차표를 끊었다. 역무원 중에는 영어가 안 되는 사람이 많은데, 자동 발권하는 기계는 나름 잘 되어 있어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시간이 좀 남아 스페인 광장을 한바퀴 돈 다음 기차에 올랐다.
누군가가 블로그에 팁이라며 몬세라트에 가는 기차는 왼쪽 창가에 앉아야 경치가 예쁘다고 했다. 맞다. 마지막 5분만 그렇다. 그 전에는 어디든 다 비슷하다. 내겐 다른 팁이 있다. 기차 맨 뒤칸이 명당이다. 기차 안에서는 안 그런데 역에서 내려서 케이블카를 타려면 맨 뒤칸이 개찰구와 제일 가깝기 때문이다. 그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케이블카 타러 가는 사람들이라 조금만 늦게 가도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몬세라트 성당의 성가대 공연은 우리가 늦게 도착한 탓에 이미 끝났고, 거기서 제일 유명하다는검은 마리아를 보는 줄은 너무 길어서 그냥 포기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검은 마리아 앞에 한 명씩 멈춰서서 각자의 소원을 빌다 보니 순서를 기다리려면 두어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신심이 내겐 없다. 성당안에서 멀리 윤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대신 전망대까지 산을 오르기로 했다. 전망대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거나 걸어 가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짧은 거리를 기차로 오르내리는데 한 사람당 13.5 달러를 달라고 해서 그냥 걸어 가기로 했다. 나쁜 결정은 아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우리가 언제 스페인의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주변 풍광도 좋았다.
하지만 그 전날 늦게까지 마신 술이 자꾸만 뒤에서 잡아 끄는 바람에 등산을 계속하는 게 힘들 것 같아 전망대까지는 못하고 적당한 위치에서 되돌아 왔다. 몬세라트의 멋진 풍경은 어지간히 다 봤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었다.
산에서 내려 온 후 배가 고파서 성당 입구의 식당에서 빵을 시켰는데 빵에 멸치가 올려져 있었다. 둘 다 입이 짧아 그 비린내를 감당 못하고 한 입도 채 못 먹고 버렸다. 그 아래 카페테리아에서 치킨하고 감자를 주문해서 맥주와 함께 먹어도 그 비린내가 잘 가셔지지 않더라. 다시 기차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점심을 너무 부실하고 또 맛없게 먹어서 저녁만큼은 맛있는 것 먹자 싶어 맛집을 검색했다. 평소엔 어디든 돌아 다니다 배가 고프면 구글 맵을 켜서 근처 식당의 별점을 보고 들어 갔는데, 그 날은 너무 지쳐서 그냥 여행블로거들의 정보에 쉽게 의지하기로 한 거다.
꽤 유명한 타파스 맛집을 찾았는데 주변을 둘러 보니 블로거를 의지해 찾아 온 한국 손님이 20%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주문하는 것마다 (타파스라 양이 적다) 평타 이상으로 맛이 있어서 이것 저것 시켜서 맥주와 함께 먹었다. 기차 여행에 등산에 맥주까지 곁들이다 보니 우린 쉽게 취했고 많이 피곤했다.
그래도 호텔 가는 길에 스페인 광장이 있고, 거기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몬주익 분수쇼를 한다기에 피곤한 몸을 끌고 스페인 광장으로 갔다. 시간에 맞춰 갔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했다. 그래도 그곳 야경이 너무 예쁘고 또 우린 충분히 취해서 자리를 옮겨 가며 여러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문제의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스페인 여행 간다니까 친구들이 제일 많이 해 준 조언은 두 가지였다. 스페인은 싱가포르 보다 뭐든 하니까 맛 있는 것 많이 먹고 술도 맘껏 마시라는 게 첫번째였고, 스페인은 소매치기가 많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였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도시가 싱가포르다 보니까 정말이지 스페인의 모든 게 다 싸게 느껴졌다. 스페인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감히 매일 같이 고기에 맥주를 이렇게까지 맘껏 먹을 수 있었을까.
소매치기 이야기를 듣고는 스페인에 내리는 순간부터 늘 지갑과 가방을 챙겼다. 지갑은 바지 앞주머니에 넣고, 가방도 늘 앞으로 매고 다녔다. 하지만 그 날은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 술에 취해 방심을 한 탓에 가방을 옆으로 맸다.
지하철 타느라 티켓을 기계에 넣고 잠시 기다리는 그 찰라의 순간에 누군가의 손이 내 가방 안으로 들어 왔다. 다행히 내가 그 기척을 느껴 그 손을 내치고, 호통을 쳤다.
왓 더 ....
세 명 정도의 무리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되돌아 갔고 난 지하철역 구내로 들어 갔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아까 그 무리들과 비슷하게 생긴 사내 둘이 서 있길래 지하철이 왔을 때 타는 척 하다가 안 타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내려 다음 지하철을 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그것도 중심가라는 스페인광장 지하철 역 구내에서 벌어진 일이다. 싱가포르 같았으면 근처에 있을 경비원에게 도움을 청하고 CCTV 분석을 통해 그들을 처벌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스페인, 그리고 난 다음 날 아침 출국을 해야 하는 처지에 소매치기범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도 없이 경찰서에서 헛된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기에 굳이 신고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냥 부풀려진 소문인 줄만 알았는데 직접 경험 해 보니 이 나라 치안은 정말이지 엉망이다 싶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대 놓고 (밝고, 사람 많고, CCTV 도 있는 곳에서) 소매치기를 한다는 건 이 나라의 단속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나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도 범행의 대상이 된다면 누구나 피해를 당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이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했더니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날 도리어 나무란다. 스페인은 소매치기가 그냥 일상인 나라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게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더 큰 사건은 다음 편에서…
오늘의 팁.
소매치기를 주의해야 한다. 이건 그냥 권장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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