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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침대가 생겼다.

나이 오십 다 되어 가도록 아직 내 돈 주고 침대를 사 본 적이 없다.

신혼생활을 옥탑방에서 시작했으니 방 하나에 세 가족이 요 깔고 살았고, 반지하 셋방으로 이사 가서 네 식구가 된 이후에도 침대 없이 살았다.
단독 주택 일층으로 이사 한 후에도 방이 작아서 침대를 놓을 공간은 없었다.

그러다 이층에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정도 되면 방에 침대 하나 있어도 좋겠다 싶어서 알아 봤더니,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며 터무니 없이 가격만 높여 놨더라.
어차피 요 깔고 자는 게 익숙해서 그냥 침대 없이 살았다.

그러다 회사 선배가 싱가포르로 이민을 가면서 침대는 안 가져 간다며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했다.
입으론 “침대는 뭘…” 하면서 엉덩이로는 침대 쿠션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얻어 온 침대가 내 삶의 첫 침대다.

그러다가 이년 뒤 나도 싱가포르로 이민을 오게 됐다.
난 그 선배와는 달리 침대도 싣고 왔다.
어차피 컨테이너 하나 빌리는 거라 침대가 있으나 없으나 비용은 같고, 이사 비용은 회사에서 대 주는 거라 부담없이 싣고 왔다.
싱가포르에 온 첫 몇 해 동안 그 침대를 계속 사용했다.

그러다 이사를 하게 됐는데 그 집엔 이미 안방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싱가포르에선 집을 구할 때 가구와 가전 제품이 완전히 포함된 집이 꽤 많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가져온 그 침대를 버리고 그 집 침대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집주인이 마련해 놓은 침대에서 살다가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침대가 없다.
이번에는 침대를 사자 싶어 몇 군데 돌아 다녔는데 싱가포르는 한국보다 침대가 더 비싸다.

싱가포르내 한국 커뮤니티에서 중고 침대를 찾아 봤다.
싱가포르에 왔다가 한국 돌아 가면서 가구를 팔고 가는 경우가 많아서 잘만 고르면 좋은 걸 싸게 고를 수 있다.
하지만 며칠을 봐도 딱히 눈에 들어 오는 게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집주인에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새로 이사 올 사람이 침대를 가지고 오기 때문에 이제껏 우리가 쓰던 침대는 우리가 이사 나가고 나면 버릴 거라고 했다.
버릴 거라면 우리가 가져가도 되냐고 했더니 당연히 그러라 한다.
집 주인 입장에서는 침대 버리는 데도 돈이 드니까 그걸 아껴서 좋고 우린 침대 따로 안 사서 좋고.

아무튼 그렇게 가져 온 침대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침대도 오래 됐는지, 우리가 침대를 격하게 사용해서 그런지 (쿨럭) 침대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내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침대가 안 좋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의사의 흘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그래, 이제는 침대를 바꿀 때가 됐구나.
침대를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이 달에 보너스도 나왔으니 눈 감고 지르자 싶었다.

가구점에 갔다.
침대를 사 본적이 없으니 일단 유명 메이커 부터 찾았다.
여기도 썰타, 킹코일, 씰리… 뭐 있을 건 다 있다.

그냥 만만해 보이는 걸 골라서 가격을 물어 보니 생각 보다 비싸다.
어차피 여기선 어떤 걸 사도 이제껏 우리가 써 오던 것 보다는 다 좋은 거다 싶어 제일 싼 걸 골랐다.

그런데 내가 가격표를 잘못 봤다.
그 가격은 침대 매트리스 가격일 뿐 프레임은 포함이 안 되어 있는 거였다.
아무리 보너스를 받았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인사 꾸벅 하고 나왔다.
이제껏 내가 본 그 어마어마한 가격이 매트리스 가격일 뿐이었다니.

침대 사는 걸 포기할 뻔 했다.
일주일 후 이번에는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서 공장에서 직접 운영하는 아웃렛으로 갔다.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침대 파는 곳만 몰려 있다는 어느 몰에 가서야 그나마 맘에 드는 가격대의 제품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한 층을 다 둘러 보고 서른 일곱 번은 더 침대에 누워 본 후에 결국 하나 골랐다.
나무 프레임에 쿠션 적당하고 부드러운 데다 한정 세일에 해당하는 놈으로.
가격은 유명 브랜드 매트리스 하나 값 보다 싸게.
2주 후에 배달 해준단다.

내 돈 주고 사는 첫 침대다.
2주 후면 새 침대에서의 첫날밤이 시작되는… 이건 아닌가.
아무튼 침대 하나 사러 돌아 다니면서 침대 관련한 내 일화를 돌이켜 보니 그 동안의 내 삶도 참 애잔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나이에도 아직 “첫”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일이 있다니.

내 첫 침대가 생겼다.

 

 

(201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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