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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의 비빔밥

일요일 저녁,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

아내는 한국 갔고, 딸은 남자 친구랑 저녁 먹고 들어 온단다.
혼자 밥 먹는 것까진 괜찮은데 혼자 먹으려고 이것 저것 준비하는 건 정말로 귀찮은 일이다.
밖에 나가서 먹고 올까 하다가 옷 갈아 입기 귀찮아서 말았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내가 한국 가기 전에 마련해 놓은 밑반찬이 보인다.
밥솥에는 아침에 먹고 남은 밥이 딱 한 그릇 정도 남아 있다.
남자들이 굶는 이유는 밥솥 뚜껑을 여는 게 무섭기 때문이… 아, 아니다.
냉동실에 조기가 있긴 하지만 그걸 해동하고 구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침에 딸 아이 밥 차려 줄 때는 오뎅국도 금방 끓여 냈는데 혼자 먹을 생각을 하니 아무 것도 하기 싫다.
 
그래 그냥 비빔밥 만들어 먹자.
있는 거 그냥 비비면 되고, 설겆이 거리도 안 나오니까 혼자 먹기에는 비빔밥이 최고다.
 
우선 찬밥을 큰 그릇에 옮겨 담고 전자렌지에 잠시 돌린다.
거기에 콩나물 무친 거 하고 무 생채, 시금치 나물을 두 젓가락씩 덜어 넣는다.
취나물 얼마 남지 않은 건 통째로 다 부어 버렸다.
거기에 고추장 한 숟갈 하고 참기름 조금 부으면 준비가 끝난다.
계란 후라이 하나 할까 하다가 말았다.
뭐 대단한 거 먹는다고…
 
나 어릴 때 내 어머니가 이렇게 자주 드셨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나물 같은 게 조금씩 남으면 상에 올리기도 뭐 하고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고 하니 그릇 하나만 가지고 비빔밥 만들어 혼자 드셨다.
그리곤 가족들은 따로 더운 밥 하고 새로 반찬 만들어 먹이셨지.
 
나도 어느새 부모가 되어 그 때의 어머니처럼 찬밥에 남은 나물로 비빔밥을 해 먹는구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비빈다.
한 숟갈 푹 떠서 그 위에 김 하나 올린 후 대충 먹었다.
 
어?
맛있다.
이런, 싱가포르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고향의 맛 그대로다.
찬밥에 나물 몇 개 올리고 고추장 넣어 비빈 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어머니는 조금씩 남은 나물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먹는 게 제일 맛있는 거라는 걸 아셨던 거야.
이 맛있는 걸 혼자 드시고 우린 엉뚱한 것만 해 주시고.
와… 이런 배신감.
 
그릇 바닥까지 긁어서 밥 한 톨 나물 한 줄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내일도 저녁은 비빔밥이다.
내일은 계란 후라이까지 해서 제대로 한 번 먹어 봐야지.
내가 좀 단순하다.
밥 하나만 이렇게 맛있게 먹어도 세상 다 가진듯 행복할 수 있다.
 
뱀발 : 그러니 너도 밥 굶지 말고 제대로 챙겨 먹어.
 

(201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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