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블로그

다물 중국 연수 체험기 3. - 연길은 중국 속의 한국

solneum 2022. 1. 26. 22:43

난 이제껏 백두산 너머의 땅은 사시사철 추운 겨울인 줄 알았다. 산에 올라가면 시베리아 호랑이가 나타나고 곳곳에 눈이 덮여 있을 줄 알았다. 연길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찌는 듯한 무더위가 날 반겼다.
 
연길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다. 그래서 거리의 거의 모든 간판이 한글로 되어 있었다. 한글과 한자를 함께 기록할 때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고 한다. 가로쓰기 할 때는 한글을 위에, 세로쓰기 할 때는 오른쪽에 써야 한다.

이화여대를 순 우리말로 풀이하면 “배꽃 큰 계집 배움터” 가 된다. 연길에서는 헬스장 간판에 “삼일에 살까기” 라고 적어 놓았다. 우리말로 예쁘게 풀어 놓은 간판이 수도 없다. 조선족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외래어, 외국어로 도배를 해 놓은 것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우리 민족의 노래라고까지 하는 선구자의 첫 대목이다. 그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을 찾았다. 관광버스 기사가 목적지에 다 가기 전에 차를 세웠다. 길이 험해서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길은 그리 험해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와 운전사가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먼 길을 걸어 가야 했다.

노래 속 일송정의 푸른 소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정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새로 심은 소나무 하나가 정자 옆에 ‘앙증’맞게 자리잡고 있었다.

연수를 따라 간 다물 이사가 일송정과 노래 선구자에 대한 설명을 한다. 혹자는 선구자를 지은 “조두남, 윤해영”의 친일 행적을 두고 비난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의 말은 당시 끝까지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 당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절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변명이다.

길이 험해서 들어오지 못한다던 버스가 일송정 주차장까지 들어 와 있었다. 가이드가 돈을 좀 쥐어 준 결과다.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젠장.

 


독립운동가들이 세우고 민족정신을 교육했다는 대성중학교로 이동했다. 조선족 처녀의 설명을 듣는 동안 낯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윤동주 시인과 문인환 목사의 젊었을 적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둘이 같은 중학교를 다닌 동창이라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쩔 수 있는’ 삶을 사신 두 분이다.

조선족 어린이들이 다니는 지신명동학교라는 소학교를 방문했다. 다물연구소와 결연을 맺은 학교라는데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모여 노래도 하고 율동도 보여줬다. 그들의 율동을 보는 동안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어린아이들이 왜 우리 앞에서 노래와 율동을 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선물이라고 내민 봉투 때문은 아니었을까?

늦게까지 학교 선생님들과 술을 마셨다. 속이 쓰리다. 58도 짜리 중국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길 시내의 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 입구에서 만난 조선족 처녀가 마사지를 받으러 오라며 한글로 된 광고지를 나눠 준다. 마사지 받는 데 만원이다. 가이드 말로는 마사지 말고 몇 가지 서비스(?)를 더 해 주고는 바가지를 씌운단다. 서울에서 스포츠마사지를 하는 친구가 생각나서 도무지 받으러 갈 수가 없다.

호텔 방에 들어 가 씻으려고 수도를 트니 녹물이 쏟아진다. 10분을 기다려도 마찬가지다. 결국 중국에서의 첫날은 씻지도 못하고 잠을 자야 했다. (계속...)

 

(2005/07/27)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