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를 내지 못했다.
지난 해 말 회사를 그만 두기로 마음 먹었다.
아니 싱가포르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내가 겪는 일들이 애초에 싱가포르에 오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들이라는 생각에 그냥 싱가포르에 있는 게 싫어졌다.
다 포기하고 어디로든 가려고 했다.
원래는 오늘이었다. 딱 오늘까지만 일하고 회사에 사표를 낼 예정이었다.
4월 말까지만 다니기로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4월은 보너스 달이라 그거라도 받고 그만 둬야 한국에 가서 몇 달이라도 버틸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단 하루도 싱가포르에 못 있을 것 같다며 회사 그만두겠다고 결정한 놈이 몇 달 뒤의 보너스를 계산에 넣다니.
어떻게 해도 먹고사니즘에서 못 벗어나는 40대 가장의 비애여.
두번째 이유로는 7월에 집 계약이 끝난다는 거였다. 사표를 내도 두 달은 의무적으로 일해야 하기 때문에 6월 말에 회사를 나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한 2주 정도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한 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시기적으로 적당했다.
7월에 한국가면 날씨도 싱가포르나 한국이나 거기서 거기일 것 같다는 생각에 살짝 웃었다.
정말이지 그 동안 오늘만 기다리며 살았다.
하지만 난 오늘 사표를 내지 못했다.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겠다고 가지고 있던 물건도 버릴 건 버리고 팔 건 팔고 불필요한 계약도 다 정리하고 통장까지 정리했는데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 영주권 갱신 기간이 올 해 말이라는 걸.
올 해 말까지 여기서 별 일 없이 살면 5년짜리 영주권이 자동으로 갱신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한국으로 가게 되면 영주권이 없어지는 거다.
나야 영주권 없어도 그만이지만 아직 학교에 다니는 두 딸아이에게는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싱가포르 대학에 입학이 예정되어 있는 작은 딸에게는 더 더욱.
며칠을 고민을 했다. 내 맘 하나 편하자고 온 가족을 힘들게 할 것인가, 이왕 버티는 거 조금만 더 버텨서 가족들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것인가.
어쩔 수 없었다.
써 놨던 사표를 찢었다.
집은 계약을 다시 했고.
어쩌면 난 10년도 더 살아 이미 익숙해진 싱가포르를 떠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도 없었고.
그래서 싱가포르를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는데 영주권 갱신이 적당한 이유가 되어 준 것일지도.
아무튼 내 거취는 일단 이렇게 정리가 되었다.
4월 말만 기다리며 살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며칠 전부터 몸이 좀 이상했다. 체온을 쟀더니 38도, 이 정도면 해열제 먹고 쉬면 되겠다 싶어 그냥 넘겼는데 하루 지나니 40도 가까이 올라가서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병원에 갔다. 의사가 약을 주면서 이틀은 쉬어야겠다고 병가 확인서 (여기선 MC 라고 부른다. 아프면 이 MC를 받아 회사에 내면 회사는 의무적으로 병가를 내 준다. 한국도 감기로 병가 쓸 수 있는 그 정도 수준은 되지? 아무렴 그렇겠지. OECD 국가인데) 를 끊어 주더라.
오늘은 금요일인데 이틀 병가가 무슨 소용이람. 이럴 줄 알았으면 목요일에 병원에 갈 걸 그랬다.
그래도 약 먹고 스무 시간 가까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더니 지금은 좀 살 것 같다. 그래서 이런 글도 쓰고 앉아 있는 거고.
내가 좀 예민한가 보다. 아니 성질이 못 돼 먹은 거겠지.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이렇게 몸이 먼저 반응을 하니 말이다.
지난 해 말부터 오늘까지 정말이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는 거였다. 그런데 버티는 것도 익숙해지니까 그게 또 사는 게 되더라.
그냥 어쩔 수 없이 버티는 삶……
이거 좀 별로다.
40도 까지 갔던 체온이 이제 37도 조금 넘는다. 약 먹고 쉬니까 원래대로 돌아 오는 거다.
아직도 자꾸만 덧나는 내 삶의 생채기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아물고 무뎌져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 갈 수 있겠지.
이번 감기 다 나으면 아마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이제 4월도 다 지나가고 있으니까.
(2018/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