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 여행지가 아니라 그냥 살고픈 동네
퍼스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예경이가 살고 있는 집으로 먼저 갔다.
예경이는 지난 3년 동안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방 하나 얻어 살았다.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는 예경이는 손녀처럼 잘 대해줬고, 덕분에 우린 다 큰 딸 남의 나라에 혼자 보내 놓고도 큰 걱정없이 지낼 수 있었다.
집은 그냥 평범한 호주의 단독주택이었다.
조그만 마당이 있고, 거기에 화단이 꾸며져 있으며 앵무새도 한마디 키우고 있었다.
예경이 방은 혼자 쓰기에 적당한 크기에 창으로 햇볕도 잘 들어와 밝은 느낌이었다.
집은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기후에 적응 못해 감기 기운이 있는 나는 잠시 쉬기로 하고 아내와 아이들은 바다로 갔다.
그리고 집 근처 바다에서 다른 휴양지에서도 건지지 못한 인생샷들을 잔뜩 찍어 왔다.
바다는 예쁘고,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은데 날씨도 좋아서 표정도 사진도 다 잘 나온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후 집 근처 햄버거 집에서 요기를 했다.
예경이가 맛은 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좀 비싸서 자주 못 가던 곳이라고 해서 부러 데리고 갔다.
패스트푸드 햄버거에 비해 확실히 맛은 좋았고, 가격은 학생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그런 정도였다.
음식을 주문하니 토큰을 세 개 주면서 나갈 때 기부를 원하는 단체의 이름이 적혀 있는 통에 넣으라고 했다.
자기들이 기부를 하겠다면서.
매출의 일부를 기부하고,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고, 내 능력의 일부를 기부하고... 뭐 이런 일들이 자연스러운 일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십일조 내면 교회 목사가 다 삥땅치고, 세습하고, 건물 올리고, 부동산 투기 하는 그런 거 말고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학교로 갔다.
졸업식에 입을 가운과 학사모를 받으러.
가운을 미리 입고 학교 곳곳을 돌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학교는 내가 서양의 대학교는 이러할 거라고 생각했던 딱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오래전 영국풍의 건물과 곳곳에 꾸며진 정원, 그리고 잔디 위에서 운동을 하는 학생들.
이런 곳에서는 그냥 있어도 공부가 될 것 같았다.
이젠 숙소로 갈 시간.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 갔다.
미리 받은 비밀번호를 이용해 보관함에 들어 있는 집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방 두개, 화장실, 주방, 세탁기, 냉장고, 그리고 넓은 거실.
네 식구가 나흘 머무는데 큰 불편함 없었고, 가격은 호텔에 비해 거의 절반 가격이었다.
집안에 CCTV 몰래 설치해서 손님들의 은밀한 모습까지 찍는 경우가 있어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게 꺼려진다는 이들도 있다.
불 다 끄고 휴대폰 이용해서 구석 구석 잘 살펴 봤지만 딱히 의심스러운 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험해진 건지, 내가 민감한 건지...
저녁은 매운 게 땡긴다는 가족들의 의견을 따라 중국식 훠거 식당으로 갔다.
호주에 온 지 이틀째가 될 때까지 호주 음식(그런게 따로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는 호주산 소고기로 만든 햄버거 말고는 먹은 게 없고 내내 한식 혹은 중식만 먹었다.
퍼스가 아시아 쪽에 더 가까운 곳이라 중국인들이 많이 들어 와 살아서 중국 사람들도 많고 아시아 식당도 상당히 많았다.
이틀째가 될 때까지도 우린 여행이 아니라 그냥 예경이가 살던 동네를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