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아랍스트리트에서 찍다 만 "비포 선 라이즈"
싱가포르에는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으로 처음 왔었다.
그 때만 해도 싱가포르에 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여행 기간 동안 싱가포르 구석 구석을 다 돌아봤었다.
잘 알려진 관광지들 위주이긴 했지만…
그 후 싱가포르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벌써 10년도 넘게 영주권 받아 살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에는 더 이상 싱가포르 관광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사니까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10주년 여행 때 이미 가 볼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여겼다.
10년 동안 싱가포르는 많이 변했고, 최근에 싱가포르를 관광한 한국 친구들이 싱가포르에 사는 게으른 나 보다 싱가포르 관광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다. 휴일마다 싱가포르 관광에 나서기로 한 건.
싱가포르 영주권자로서가 아니라 싱가포르 관광객의 자세로 싱가포르 구석 구석을 돌아보기로 했다.
맨 처음 찾은 곳이 아랍스트리트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이슬람 사원인 술탄 모스크와 한때 싱가포르의 말레이 술탄의 왕궁이었던 말레이 헤리티지 센터를 중심으로 싱가포르 안에서도 좀 더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다.
관광객들은 모스크와 헤리티지 센터 방문이 목적이지만, 일주일의 노동을 마친 싱가포르 시민들에게는 분위기있게 술 한잔 할 수 있는 핫 플레이스다.
술탄 모스크는 크고 웅장한 황금돔 때문에 아랍스트리트에 들어서면 금방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교인들의 예배를 위해 관광객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입장시키는데 그 날은 오후 4시가 마감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모스크 주위를 한참 서성 거리다가 바로 옆에 있는 헤리티지 센터로 갔다.
여기도 이미 문을 닫았다. 6시까지만 연단다.
아랍스트리트에 왔는데 모스크와 헤리티지 센터 모두 못 들어 가니 완전 망한 거… 는 아니다.
모스크 주위의 골목마다 이국적인 형태의 건물들이 각종 벽화와 그래피티로 장식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관광객의 눈길을 잡아 끈다.
거기에 크고 작은 바가 많아서 어디든 앉아 맥주 한 잔 하기 좋다.
술 값은 동네 술집 보단 비싸고 시내 관광지보단 좀 싼 딱 그 정도다.
골목을 한참 돌아 다니다가 길 모퉁이에 있는 바에 자리를 잡았다.
옆 테이블에는 서양 여성 한 명이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말없이 아이패드를 꺼내 다운 받아 놓은 여행잡지를 보기 시작했다.
서서히 노을이 지고 거리엔 조명이 들어왔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다 예뻐 보이기 시작했고, 알코올까지 혈관을 돌아 다니기 시작한 후다.
그래서겠지. 어느새 옆 테이블의 여성과 서로 읽고 있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스턴에서 온 출판업자라고 했고, 난 싱가포르에 사는 이주노동자라 했다.
이름이 소냐인데 Sonja 라고 쓰기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면 대부분 손자라고 부른다고 했고, 난 사람이 좀 비리비리해서 친구들이 빌리라고 부른다는 농담을 하고 싶었는데 영어가 안 돼서 그냥 영화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의 주인공 빌리 크리스탈의 이름과 같다고만 했다.
그러자 그녀는 지난 달에 빌리 조엘의 콘서트에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여줬다.
머리가 벗겨진 빌리 조엘이라… 흠
우리의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초청한 쪽에서 접대를 한다며 고급 랍스터 식당으로 데리고 가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보스턴에서 제일 흔한 게 빨간 양말(보스턴 레드 삭스)과 랍스터라며 웃었다.
난 싱가포르에 산 지 10년째인데 오늘 처음 아랍스트리트에 와 봤으며 그 마저도 시간을 몰라 모스크와 헤리티지 센터 둘 다 못 들어 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낯선 이국에서 만난 두 사람, 시시하지만 서로가 열심히 들어주는 이야기, 그리고 술과 음악.
뭔가 살짝 영화 “비포 선 라이즈” 필이 난다 싶을 때 전화가 울렸다. 아내였다.
아, 참. 난 유부남이었지.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고 우린 즐거운 추억만 서로 주고받은 채 헤어졌다.
앞으로 이런 관광 자주 할 것 같다.
(2016/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