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여행 이틀째, 전쟁에서 뭘 배웠을까?
호치민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건 3G 가 되는 SIM 카드를 사는 거였어.
아무래도 인터넷 연결은 되어야 하겠고, 로밍은 비싸니까 따로 준비해 온 전화기에 SIM 카드를 끼워 쓰기로 했지.
공항에 있는 열개 남짓한 가게가 거의 전부 SIM 카드를 팔고 있었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의 큰 가게에서는 27만동짜리를 권했지만 난 가장 구석의 작은 가게에서 17만동짜리를 샀어.
결과만 말하자면 나흘동안 데이터를 무한대로 사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택시는 관광객에게도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는 VINASUN 택시를 골라 타고 호텔로 갔어.
공항이 시내와 워낙 가까워서 그 유명한 교통 혼잡에도 불구하고 금방 갈 수 있었어.
호텔에 짐 풀고 여행자거리로 갔지. 구찌터널 일일관광 상품을 예약해야 했거든.
제일 유명하다는 신카페에 가서 예약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녔어.
대부분의 여행자 거리가 다 그러하듯 살짝 들뜨고 또 그만큼 풀어진 분위기. 거기에 가게마다 크게 늘어 좋은 음악 때문에 많이 시끄러웠어.
여행자 거리의 분위기에 취해 거기에 스며들기엔 내가 좀 닳고 달았나 봐.
군데 군데 관광객을 유혹하는 야릇한 옷차림의 어린 베트남 여성들도 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벤탄 야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어.
근처에 쌀국수 잘 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그런데 가는 길에 커다란 임시 공연장을 발견했어.
거기선 독립 71주년 기념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베트남어를 몰라 대충 해석한 거니까 의미가 다르면 알려 주시라) 한 눈에 봐도 뭔가 대단해 보이는 공연이었어.
일단 출연자 수가 대단했고 순서에 따라 전쟁의 모습, 전후 복구의 모습, 그리고 베트남의 지금 모습을 춤과 노래로 보여주고 있었어.
난 배 고픈 것도 잊은 채 공연에 빠져 들었지.
그런데 살짝 맘에 걸리는 게 있더라.
관객석은 임시로 플라스틱 의자를 갖다 놓았는데 그 맨 앞자리는 푹신한 의자와 테이블까지 갖다 놓고 고위 공무원인듯한 이들이 따로 자리를 잡고 있었어.
그 자리와 일반 관객석 사이도 제법 띄워 놓고 말이야.
권위주의에 찌든 후진적인 모습에 인상이 저절로 구겨지더라.
크게 잘난 것 없는 이들이 별나게 권위 찾고 구별 지으려 하고 대접받으려 하는 것 같아 보기 좋지 않았어.
나라가 가난해서 후진국이 아니라 권력 가진 이들의 정신세계가 후져서 후진국이라는 생각을 했어.
공연을 다 보고 겨우 도착한 벤탄 시장. 낮에는 건물 안이 시장인데 밤엔 건물 양쪽의 길을 막고 야시장을 열고 있었어.
구경할 건 많은데 막상 사려니 살만한 건 또 별로 없더라.
그때까지 저녁도 안 먹어서 야시장 안에 있는 임시 노점에 들어 갔어.
이런 저런 해산물을 구워 파는데 맛은 그저 그랬어.
아무래도 관광객 상대로 하는 곳이라 모든 게 날림으로 해 내는 느낌이었어.
다음날 아침, 구찌터널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어.
스무 명 남짓한 일행 중 딱 절반이 한국 사람이더라.
외국에서 한국 사람 만나면 반가울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조금 불편하더라.
해외 여행을 온 게 아니라 경주에 버스 대절해서 온 단체 관광객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다들 인터넷으로 비슷한 걸 검색해서 비슷하고 안전한 상품을 고르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구찌터널에선 심하게 실망을 했어.
구찌터널에 대해선 미리 공부를 하고 갔기에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 되고, 거기서 치열하게 살았던 베트남 인민들의 삶에 대해서도 경외감 같은 게 있었어.
하지만 베트남에서 구찌터널을 관광 상품화한 이유가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베트남이 미군을 이긴 그 역사를 자랑하고 자위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정나미가 뚝 떨어졌지.
투어 내내 긴가민가 했는데, 한쪽에 사격장을 만들어 놓고 관광객에게 직접 실제 총을 쏘게 하고 돈을 받는 걸 보고 확신할 수 있었어.
역사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같은 역사가 반복되기 마련이야.
전쟁이 나고 또 다시 미국을 이긴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나라가 전쟁터가 되는데...
애초에 호치민에 가면 무이네에 가서 모래언덕을 보거나 메콩 델타에 가 볼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구찌터널 다녀온 후 맥이 풀려 둘 다 포기했어. 무이네 모래언덕이야 지난 해 멜버른에서 본 모래 언덕과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았고, 메콩 델타의 경우 캄보디아에서 들렀던 톤레삽 호수로 대체가 가능할 것 같았어.
그런 관광 말고 호치민과 호치민 사람들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어.
그래서 남은 이틀은 그냥 호치민에 머물러 있으면서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니기로 했어.
그 얘긴 다음에 이어서 할게.
(2016/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