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포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건데. 씨"
중학교 다닐 때 공부를 제법 잘 했었다. 방 하나 다락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집 형편을 잘 아는 동네 약사 아저씨는 나를 집으로 불러 자기 아들과 함께 공부하기를 권했다. 노는 책상이 있으니까 편하게 공부하라면서.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들이 나와 나란히 앉아 공부하다 보면 뭐라도 건질 거라는 생각을 했던 거다. 우린 약사 아저씨의 기대와는 달리 공부 대신 유선방송에서 틀어 주는 성룡영화를 더 자주 봤던 기억이 난다. 집에 자식 수만큼 책상을 들여 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리 집은 책상도 없어서 밥상을 펴 놓고 공부를 했었는데.
당시 내 꿈은 국문학자였다. 국어 과목이 좋았고, 성적도 잘 나왔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해서 국문학자가 되면 늘 책만 보면서도 먹고 살 줄 알았다. 거기에 더해 소설가, 시인, 기자 같이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봄에 아버지는 내게 공고에 진학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취업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때가 1985년이었고 당시 대학진학율은 30% 남짓이었다. 누구나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어떻게든 취직이 가능한 그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양복점을 운영하다가 기성복 시장이 새로 열리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양복점 대신 차린 수선집, 수선집을 접고 차린 분식집이 줄줄이 망하는 바람에 조선소와 목재 공장을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파출부(그 때는 가사도우미를 이렇게 불렀다)일을 했다. 그 상황을 아는 나는 두 말도 않고 공고에, 그것도 장학금이 많아서 학비가 한 푼도 안 든다는 국립 부산기계공고에 진학을 했다.
공고에서도 국어, 수학, 영어를 배운다. 하지만 인문계 학생들이 철학이나 물리, 제2 외국어 등을 배우는 시간에 거기서는 금속이나 전기를 배운다. 그리고 실습 시간에는 용접도 하고 쇠도 잘라 보고 전기 회로도 만들어 본다. 첫 실습 시간에 줄로 쇠를 깎는 걸 배울 때 난 깨달았다. 이건 내가 잘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아니라는 걸.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었다.
그러다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을 뽑는 걸 알고 거기에 지원을 했다. 학교에는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당시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세운 큰 도서관 건물이 있었고 그걸 관리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근로장학생이 되면 수업은 수업대로 하지만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는 늘 도서관에 있을 수 있었다. 자격증 준비를 위한 방과 후 실습도 빠질 수 있었다.
대신 사서를 도와 책 정리나 수선을 하고 도서관 청소, 신문이나 잡지 등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수업은 가능한 한 빠지고 늘 도서관에서 소설이나 무협지, 교사들을 위해 따로 빼 놓은 잡지만 읽었으니 성적이 잘 나올 수가 없었다. 입학한 후 첫 시험에서 전교 10 등 안에 들었는데 졸업하기 전 마지막 시험에서는 반에서도 10등 안에 들지 못했다.
그래도 졸업은 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대기업에 취업도 했다. 그러다 1991년 강경대 사망사건과 관련해서 시위할 때 나눠 줄 유인물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잘렸다. 글 쓰는 걸로 먹고 사는 게 꿈이었는데 쓰겠다는 사람이 없어 우연히 쓴 글 하나로 인해 잘 다니던 회사에서마저 잘렸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다.
그 후에 어찌 다시 취업을 했고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PC통신 게시판이나 한겨레신문 자유토론방 등에 가끔 내 생각을 자유롭게 올리는 게 전부였다. 2000년, 오마이뉴스가 창간되었고 거기는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기에 시민기자로 참여를 했다. 내 이름 걸고 나름 정돈된 글을 쓴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글쓰기는 재미있었다. 운도 따라서 내 기사가 제법 많은 이들에게 읽혔고, 오마이뉴스에서는 나를 세 번이나 올 해의 뉴스게릴라로 선정해 상을 주기도 했다. 터키에서 열린 세계시민기자포럼에는 시민기자의 사례로 뽑혀 거기에 참여하기도 했고, 한국에서 할 때는 언론인들 앞에 두고 사례 발표를 하기도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난 점점 더 글쓰기에 빠져들었지만 그 때문에 또 다시 회사에서 잘리게 됐다. 사회 문제에 대해 내가 쓴 글들은 대기업 인사담당자 입장에서는 불온문서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한국에서는 직장을 찾지 못하고 내 정체를 모르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 싱가포르로 이민을 간다고 했더니 오연호 대표가 나를 보자고 했다. 싱가포르 말고 오마이뉴스에서 함께 해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반도체 일 말고 기자는 어떻겠냐고. 오마이뉴스 때문에 내가 회사에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대표는 내게 어떤 책임감 같은 걸 느꼈나 보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받게 될 월급을 이야기했더니 두 말 안하고 잘 가라고 했다. 월급은 적어도 보람 있는 일이라며 한번만 더 권했으면 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 그래도 싱가포르를 선택했을 것 같다. 기자가 되는 건 평생을 품어 온 꿈이지만, 그 꿈을 선택하기에는 당시 내가 처해 있던 상황이 너무도 안 좋았다. 남의 나라에 가서 일년 365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도 회복이 어려운 그런 상황. 창간한 지 얼마 안 되는 인터넷 언론사는 싱가포르의 다국적 기업의 급여 수준을 맞춰 줄 수는 없었다. 난 내 윗세대가 독일에 광부로 가는 심정으로 싱가포르를 택했다. 오대표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아리더라. 내 평생을 바라던 일이었는데……
1988년에 첫 취직을 해서 중간에 학교를 잠깐 더 다니고 군대 다녀온 기간을 빼더라도 거의 30년을 반도체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잘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와 내 가족 이만큼 건사하도록 해 준 고마운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 내 사는 모습이 내 스스로 맘에 안 드는 날이면 포기하고 살았던 내 꿈들이 내 심장 어딘가에서 아픈 고름을 짜낸다.
영화 <스물>에 보면 만화가가 꿈인 동우가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겠다고 하자 친구들이 그 결정을 격하게 나무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 때 동우는 이렇게 말한다.
"그만해. 왜 뭐라 그러는데? 왜 포기하는 사람은 욕 먹어야 되는데? 세상에 뭐, 김연아 박태환 같은 애만 있냐? 그렇게 되려다 포기한 애들은 다 욕 처먹야 되는 거야? 왜? 왜? 포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건데. 씨."
"포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건"지 해 본 사람만 안다. 이제는 그 포기라는 것도 또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도 안다. 어릴 적 꿈은 반으로 접어 두고 이제껏 살았는데 앞으로 내 사는 동안 행여 다시 펴 보게 될 날이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김연아 박태환 같은 애”말고, 그렇게 되려다 포기한 애들 모두에게 욕 대신 격려를 해 주는 세상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