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투성이 부부배낭여행 #17. 파리에서 임시 여권 만든 기억
“아니, 이게 말이 돼요? 식당에서 밥 먹고 일어 서려는데 의자에 걸쳐 놓은 가방이 사라진 거에요. 식당 안에 CCTV도 있고, 아내랑 나랑 둘이 있었는데.”
“그래도 거긴 관광지 식당이잖아요. 우린 호텔 조식 먹다가 가방이 사라졌어요. CCTV는 동작 안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파리 영사관에서 임시여권 발급을 기다리며 주고받은 대화다.
아침 일찍 파리 영사과로 갔다. 임시여권이라도 있어야 출국을 할 수 있으니까. 10분 전에 도착했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근처 빵집에서 빵 하나 사 들고 바로 옆 로댕 박물관 바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다시 돌아 오니 문 열고도 40분이나 지나 있었고,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번호표 없이 앉아서 대충 자기 순서다 싶을 때 가서 접수하는 원시적인 시스템 때문에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내 앞 사람은 여권 재발급을 위한 수수료를 카드로 결제하려고 하니까 현금 밖에 안 된다면서 ATM 가서 현금을 뽑아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발길을 돌렸다. 난 다행히 주머니 안에 비상금이 있어서 그걸로 해결하긴 했지만 나처럼 가방과 지갑을 다 잃어 버린 사람은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는 지 궁금하다. 그런 경우에 도움이 되라고 영사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신청서류도 제대로 비치되어 있지 않고, 비치된 볼펜 세 개 중 두 개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에 직원들마저 불친절했다. 여기 온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가방을 도둑 맞아서 온 사람들인데 좀 더 배려할 수 있지 않나. 싱가포르 영사관 직원들은 친절한데, 파리 영사관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 따라 다른 건지, 영사관이 있는 나라에 따라 다른 건지는 모르겠다.

딱 한 시간 걸려 임시여권을 손에 쥐고 나왔다. 가방도, 지갑도, 돈도, 뮤지엄 패스도 없는 상황에서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파리 시내를 거닐었다. 콩코드 광장과 이름 모르는 공원을 거쳐 루브르로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오기로 하고 영화에 자주 나오는 왕실 정원에서 잠시 쉬었다.
프랑스 음식점에서 가방을 잃어 버린 이후로 프랑스 음식도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전철 타고 한식당에 거서 한식을 먹고 다시 루브르로 돌아 왔다. 안에는 못 들어 가도 루브르 근처가 볼 게 많거든.

그런데 점심도 먹었고, 임시여권을 만들고 나서 긴장이 확 풀려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다. 그래서 루브르 안쪽의 마당 벤치에 누워 낮잠을 잤다. 마당 가운데에선 어느 청년이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 잠결이지만 그 소리가 아름다웠다. 유명 관광지에서 관광은 안 하고 벤치에 앉아 책을 보거나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됐는데 내가 해 보니 나중에 그것만 기억에 남더라. 좋았다.
한참을 쉬다가 퐁네프 다리를 거쳐 불에 타 버린 노트르담 성당과 세익스피어 앤드 컴퍼시 서점을 둘러봤다. 노트르담 성당 꼭대기에서 보는 파리의 풍경이 에펠탑이나 개선문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아름다운데 그걸 아내에게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웠다.

파리 지하철이 익숙하지 않아 여러 번 헤매다가 겨우 개선문으로 갔다. 몇 해 전 혼자 이 개선문에 왔을 때 다음에 꼭 여자 친구랑 같이 와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그 꿈을 이뤘다. ㅎ
머리가 안 좋으면 사는데 여러가지로 도움이 된다. 전 날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을 잃어버렸음에도 하룻 만에 그걸 다 잊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잊어버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도 없다.

오늘의 팁.
파리 영사관 상당히 불친절하고 불편하고 늦게 가면 사람이 많아 오래 기다려야 한다. 여권이 필요하면 문 열 때 맞춰서 바로 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