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실수투성이 부부배낭여행 #04. 그 실수가 내게 큰 교훈이 되었다.

solneum 2020. 5. 19. 07:51

마드리드에서 첫 날을 보낸 다음 날, 톨레도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 오기로 했다. 도시 국가 싱가포르에 살다 보니 마드리드 같은 대도시에는 큰 흥미를 못 느끼겠더라. 특별한 일정표 없이 움직이는 여행이라 톨레도행을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좋았다. 딱 내 취향의 도시였다. 그냥 15박 16일을 여기서 보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랬다면 프리힐리아나나 론다에서의 환상적인 경험은 없었겠지만.

이건 스페인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 중에 내가 저지른 갖가지 실수를 정리하는 글이니까 톨레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추천해 주고 싶은 코스는 있다. 톨레도 대성당을 보고, 산 마르틴 다리를 건넌 후 파라도르 호텔의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톨레도 풍경을 바라 보는 것이다.

스페인의 바에서는 맥주나 와인만 주문해도 안주 삼아 작은 타파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는데, 파라도르 호텔 카페의 타파스는 다른 데 비해서도 상당히 잘 나오는 편이라 낮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맥주 세 잔이나 시켜 먹으며 몇 시간을 거기서 눌러 앉아 톨레도 풍경만 바라 봤다.

유명 관광지 돌아 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 보다 백 번 내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 평생 이토록 여유롭고 평화로운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이 풍경을 바라 보며 몇 시간을 맥주만 마셨다.
신혼여행 아니다. 결혼 23주년 기념 배낭 여행.

 



한참을 앉아 있다가 버스를 타러 쉬엄 쉬엄 걸어 내려 갔다. 내려 가는 길 곳곳이 포토존이었다. 

난 사진을 잘 모른다. 조리개값 조절해 본 적 없고, 셔터 스피드 바꿔 본 적 없다. 구도, 조명, 심도... 사진찍으며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냥 여러장 찍어서 제일 잘 나온 것 몇장 보관하고 만다. 사진 잘 찍는 사람, 정말이지 부럽다.

내 카메라는 한 오년 전에 산 RX100M2. 대충 찍어도 제법 잘나온다기에 산 똑딱이 카메라다. 이게 좋은 게 뭐냐면 휴대폰과 연결하면 휴대폰으로 카메라를 조정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거다.

카메라를 적당한 곳에 올려 놓고 휴대폰으로 줌을 조절해서 셔터를 누르면 되니까 다른 사람에게 부탁 안하고 부부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좋다. (뽀뽀하는 사진은 대체 누가 찍어 주는거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있어서... ㅎ)

하지만 카메라 놓을만한 곳이 없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한다. 운좋게 사진 잘 찍는 이가 걸리면 작품 하나 건지기도 한다.

톨레도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걸 배경으로 우리 둘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 옆에 있던 젊은 부부에게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저 실례지만 사진 한 장 부탁 드려도 될까요?”
하지만 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부부가 시각장애인이란 걸 알아챘다.
아...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런데 그 순간 남자가 카메라를 넘겨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해본 적이 없어서 잘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볼게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나 순간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좋은 사진 나올 거에요.”

셔터 위치를 찾느라 더듬는 그를 위해 손가락을 살짝 옮겨 주고 방향을 알려준 뒤 우린 자세를 잡았다. 첨부한 사진이 그렇게 나온 사진이다. 별도의 편집이나 크롭없는 원본 그대로다.

 

 

그렇게 해서 이 사진이 내 인생의 사진이 되었다.

 



“오늘 찍은 사진 중에 제일 맘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는 나도, 사진을 찍어준 그도 크게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여자는 전혀 앞을 보지 못했고, 남자는 지팡이를 의지하긴 하지만 빛의 강도 정도는 구분이 가능해 보였다. 그런 둘이서 지팡이를 의지한 채 여행을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을 수 밖에.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 대고 둘이 늘 행복하기를 빌었다.

스페인 여행 중에 찍은 사진 중 가장 맘에 드는 사진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터무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게 실수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장애인도, 심지어 시각장애인도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기쁘게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오늘의 팁

잊지 말자. 장애인도 여행을 한다. 다른 게 선진국이 아니다. 장애인들의 여행이 불편하지 않은 나라가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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