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잠이 오니? 밥이 넘어 가니? 그러고도 니가 애비니?
(2006/09/10)
방금 영화 <괴물>을 보고 왔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영화에 대해 떠든 게 (우린 모두 너무 비겁하다) 좀 민망하기도 하고, 싱가폴에서 개봉하는 한국영화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해서 개봉하자마자 가족과 함께 봤다.
영화를 보고 난 내 감상은 보기 전과 똑 같다.
도대체 이 영화를 두고 가족영화라 우기는 작자들은 눈을 어디에 붙이고 사는 걸까?
어떻게 현서를 보면서 효순이와 미선이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효순이의 ‘ㅎ’ 과 미선이의 ‘ㅅ’ 을 따서 만든 중학생 교복을 입은 현서만으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주한미군이 한강에 퍼 부은 포름알데히드 480병을 영화 맨 첫 장면에서 보여 줬는데도 괴물을 통해 피범벅이 되었던 미군의 그 장갑차가 떠올려지지 않는단 말인가?
괴물이 토해 낸 그 시체와 뼈들을 보며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노근리 학살을 연상한 건 과연 나 하나 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괴물의 꼬리에 현서가 감기는 그 순간부터 괴물 입에서 죽은 현서를 끄집어 내는 그 순간까지 난 가슴이 먹먹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죽은 걸 뻔히 알면서도 현서가 다시 눈을 뜨기 바란 게 얼마나 허망하던지.
(하마터면 내 옆에 앉아 연신 웃음을 참지 못하던 싱가폴 놈을 두들겨 팰 뻔 했다)
영화가 끝나고 다들 자리를 뜰 때도 난 일어 날 수가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면 효순이 미선이 영정이 스크린에 비춰질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영화 속에서는 박강두가 미군 장갑차 아니 괴물의 입 속에 죽창 아니 쇠막대라도 꽂았다.
박해일은 장갑차 아니 괴물을 향해 화염병이라도 던졌다.
우리는 뭔가?
효순이와 미선이가 죽던 날, 우린 붉은 옷을 입고 거리로 뛰쳐 나와 ‘대한민국’을 연호했었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추모비가 한미 동맹에 방해가 된다며 야밤을 틈타 부숴 버린 놈들도 있었다.
어떤 미치광이는 효순이와 미선이를 깔아 죽인 미군 병사를 위로한다며 돈을 건네기도 했단다.
장갑차 운전병은 미국으로 달아 났고, 그 누구도 책임 지는 사람 없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고, 아무 것도 달라진 것 없이 세월만 흘렀다
그리곤 그 때의 일을 또 하나의 "살인의 추억"으로 만들어 놓고 감탄하고만 있다.
미쳤다.
죄다 미쳤다.
뇌 속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은 박강두가 아니라 바로 우리다.
내 딸 같고, 내 여동생 같은 그 아이들을 죽게 만들어 놓고선 ‘대한민국’을 외쳤던 우린 모두 머리 박고 뒹굴어야 한다.
괴물은 현서만 잡아 간 게 아니다.
한강변에서 클래식에 심취 되어 있던 아리따운 처녀에서부터 거리의 아이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친미면 또 어떠냐 하는 년놈이라고 해서 괴물의 먹이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매향리에 매화향기 대신 화약냄새로 덧칠하고, 대추리에 죽음의 깃발을 세우려는 괴물이 아직도 대한민국 수도 한 복판에 서식하고 있다.
괴물이 바로 옆에 있다고 알려 줘도 귀를 막는다면 결국 먹이가 되는 수 밖에 없다
먼 타국에서 괴물을 본 지금 이 순간, 괴물이 바로 내 옆에 와 있는 기분이다.
취하지 않으면 두려움과 쪽팔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다